[TC]'바보에게 경의를' A.D. 2083.

[TC]'어리석은 전쟁' A.D. 2062.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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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에게 경의를.
-A.D. 2083. 재건연합 창설 20주년 기념일.


  "의장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자신을 깨우는 소리에 편안히 감겨있던 눈꺼풀이 느리게 떠졌다. 기억을 더듬던 생각의 손길 또한 서서히 멎어갔다. 아직 미몽에서 덜 깨어난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낸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예. 휴식중에 죄송하지만 미룰 수 없는 일정입니다."

  눈 앞에 있는 젊은이는 자신의 표정을 살피면서도 할 말은 다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좌하는 비서실장으로써 '오늘의 일정'을 결사적으로 사수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늘 예정된 일정은 '오늘의 일정'따위로 치부할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알겠네. 십 분 내로 준비하지."
  "예. 맞춰서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문을 닫고 자리를 뜨자, 지금까지 안락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노신사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등 뒤 창가에 쳐진 블라인드로 다가갔다. 블라인드를 벌리자, 황혼의 찬란한 햇살이 노신사의 눈가를 적셨다. 눈가로 쏟아지는 햇살을 직시하며, 노신사는 아까 전까지 하고 있던 회상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저격수로 황폐한 거리를 떠돌때, 그의 옆에서 투덜거리던 그의 전우를, 그 친구가 철골더미 속에서 웅변하듯 토해내던 열변을 생각했다.

  "보고있나?"

  덧없는 중얼거림. 이제는 혼자인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기약도 없는 늙은이의 푸념이었다. 그럼에도 노신사의 독백은 이어졌다.

  "살려보려했네. 자네의 희망을, 이상을, 그리고 우리 모두를."

  노신사가 벌려놓은 블라인드 너모로 우뚝 선 첨탑이 들어왔다. 첨탑 정상에는 두 명의 병사가 여덟명의 민간인을 폐허 더미에서 끌어내는 조각상이 세워져있고, 밑으로 뻗어간 지지대에는 이렇게 씌어져있었다.

  "모두가 살아 남을것이다. 2040년, 재건연합 결성."

  노신사의 읊조림에는 물기가 배어있었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지..."

  노신사는 그의 지팡이와 의장복을 챙겨입었다. 그리고 문을 나섰다. 그가 떠나간 방 한켠에는 20년의 먼지가 쌓인 저격소총만이 묵묵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점점이 뚫린 창문을 타고 황혼의 일광이 층계를 적셨다. 일광이 비치는 층계를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며, 의장은 문득 자신의 삶의 궤적이 그 끝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깨에 걸쳐진 의장의 권장인 도금된 로프가 오른 팔에 묵직하게 휘감겨왔다. 온몸의 관절이 시리도록 저려오는 걸 참아내며 의장은 자신의 노구를 이끌고 층계참을 올랐다.
  이윽고 층계참의 끝에 다다른 그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의장병들과 의원들을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 의장병이 의식에 쓰는 셉터 스피어를 바로 하여 예를 취하고는 그의 곁에 섰다. 나머지 의장병들도 각 의원 곁에 섰다. 의장 자신까지 해서 모두 아홉 쌍의 대열이었다. 한 의원이 입을 열었다.

  "의장님,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상책입니다."
  "하지만, 실패라도 한다면..."

  순간 의장이 몸을 휘청거렸다. 지팡이와 수석의장병의 부축에 의지해 중심을 잡은 의장이 의원들을 직시하며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이대로 이 도시를 유지시킬 수도 있소.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나, 아니 우리에게 몸을 의탁한 인류 전체가 연옥으로 떨어지고 말거요. 그리고 우리는 그 연옥중 가장 깊은 곳에 떨어지겠지. 모두를 그 곳에 떨어트린 죄로 말이오."
  "그 말씀은..."
  "물론 그 날이 당장 오지는 않겠지. 당장은.."

 의장이 입을 다물자 무거운 침묵만이 그들 사이로 떠돌았다. 수석 의장병이 입을 열어 침묵을 쫓았다.

  "의장님 이제 나가실 때입니다."

 의장병 두명이 정면에 있는 거대한 문을 천천히 열어젖혔다. 열린 문 너모로 군중들의 함성소리와 붉은 빛 물걸이 흘러들어왔다. 의장은 기우뚱거리는 몸을 수석 의장병에게 의지한채 천천히 탑의 연설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옮겨나갔다. 등을 구부린채 연설대로 나아가는 의장의 뒷모습은이, 마치 지옥을 짊어진 듯 처참해보였다.


  "우와아아아!!"

  함성소리가 연단을 강타했다. 대광장을 내리누르는 듯한 오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의사탑(Senete tower)의 연설대 위에서 두 손을 치켜든 의장의 풍채는 당당함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함성을 지르는 군중들에게서 생기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는걸까. 문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부축을 받던 그 의장이 아니었다. 수석 의장병은 볼때마다 놀라운 의장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는 정면의 수만 군중과 수도 '재생'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황혼이 물들이고 있는 '재생'의 고층 건물들, 그 중심에 위치한 대광장과 재건 기념탑. 그리고 광장에 운집한 생기넘치는 군중들. 도시 전체에 '살아있음'이 흘러넘쳤다. 2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금 그 살아있음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다. 광장 곳곳에 위치한 대형스크린이 의장의 늠름한 모습을 비추었다. 지금 이 순간, 이 대광장의 군중뿐만 아니라 지구 상에 있는 전 재건연합의 도시민들 전체가 의장과 수도'재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석 의장병은 재건연합의 시민들이 '살아있음'까지 보고 느끼고 간직하길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여러분!"

  의장이 자신의 홀을 들어올리며 우렁차게 외쳤다. 대광장 구석구석에 설치된 음향시설이 필요없을 정도로 웅혼한 목소리였다.

  "오늘 하루. 우리는 살아있음을 축하하고 노래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20년 전의 잿더미에서 다시 살아난 '재생'의 역사를 기렸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우리가 일궈낸 재건의 과업과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다시 한 번 함성소리. 의장은 홀을 들어올려 관중을 진정시켰다.

  "인류는-"  의장은 군중들을 빙 둘러보았다. "인류는 살아남았습니다. 비록 지난 60년 동안 타락한 위정자들이 수많은 과오와 잘못으로 스스로의 목을 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의 의지로 뭉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그 위기를 타파했습니다. 인간은 실수합니다. 인간은 과오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실수로부터 배우고 발전합니다. 인류에겐 역사가 있습니다. 실수의 역사, 그리고 그 실수들에서 배운 발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살아있음의 역사, 생(生)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 때,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의장의 머릿속에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있어.'

  의장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속삭임을 쫓아버리고는 홀로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모두 저기를 보아주십시오."

  군중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자 장막으로 덮힌 높다란 무언가가 서치라이트로 된 조명에 빛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20년 동안의 결실이 이제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왔습니다. 재건연합의 시민 모두가 흘린 땀이 저곳에 서려있습니다. 그러나 저것은 단순한 결실일 아닙니다. 저것은 약속입니다. 저것은 미래입니다. 저의 약속이며, 여러분의 미래입니다. 저것은, 저것은-"

  의장이 숨을 멈추자 군중들도 숨을 죽였다. 의장의 얼굴에 오만가지 상이 스쳐지나갔다. 몇 초가 지났을까. 마침내 의장이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희망'입니다!!"

  의장의 함성과 함께 거대한 장막이 걷혀지며 베일에 싸인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발사대였다. 발사대는 비스듬히 기울어져있었고, 견고한 스틸 케이블이 발사대의 하중을 지탱하고 있었다. 발사대 주변으로 수백, 수천개의 로켓 포드가 늘어서있는 모습이 스크린을 통해 연합 전역으로 방송되었다. 의장은 우주개척의 시발점이 될 '희망' 발사 시설의 역할과 비전을 설명했다. 우주로 가는 길, 미래에 대한 약속이 될 '희망'기지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의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곳이 이 지구가 아니더라도, 저 우주 어딘가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남을 곳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며, 그 누구도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남을 그 이름, 인류에게 경의를!!"

  의장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인류에게 경의를!!'을 목이 쉬어라 반복해서 외쳤다. 그 모습을 보는 수석 의장병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의장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16년 동안 연합의 대소사에서 의장을 수횅해온 그는 의장의 곁에서 많은 것을 듣고 보았다. 재건연합의 미래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다. 아니, 이 불안정한 공동체를 어엿한 국가 수준까지 끌어올린 의장과 그의 옛 동료-그는 4년 전에 방사능 중독으로 죽었다-의 능력이 놀랍기만 했다. 언젠가 의장이 재건회의에서 말한 바 있듯이 그들에겐 '하루하루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 기적의 은총도 이제 슬슬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개척단을 곳곳에 파견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에 전진기지를 세우고, 무너진 군사기지와 사회기반시설을 찾아 생필품과 원자재를 회수해 공급하고, 방사능을 제독해 거주구를 넓히고, 전쟁전 운송의 중심이던 지역간 하이퍼웨이를 재건해 운송망과 연락망을 구성하고, 내부와 외부의 위협세력을 진압하고...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인구부양 가능 수준은 빠르게 격감하고 있었다. 인류가 만든 병기에서 흘러나온 극독의 위세가 너무 강한 탓에 회수 가능한 원자재가 극도로 제한되버렸고, 살아남은 인류 사이에서는 각종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 건강한 유전자 풀이 급속도로 바닥나고 있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핵병기의 방사능은 최소 200년이 지나야 그 기세가 한 풀 꺾일 것이라고 연합의 과학자들은 예측했다. 그 떄에는 인류는 자원 고갈과 기아로 전멸해버리고 말것이다.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없었다. 재건연합의 겉모습은 찬란했지만, 그 찬란함은 회광반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의장이 재건연합의 남은 자원 모두를 끌어모아 '희망'기지 건설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도 실상은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
  '희망'기지는 로켓 포드 유지 시설과, 그 포드들을 쏘아올릴 발사대로 구성되있었다. 의장은 이 로켓 포드에 건강한 사람들을 동면시켜 우주로 쏘아보낼 생각이었다. 특별한 목적지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각 포드들은 우주를 유영하다 거주 가능한 행성을 발견해 정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희박했다. 의장 스스로도 "대다수의 캡슐은 우주 미아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무엇보다도 지구와 유사한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 자체가 의문이었다. 재건연합의 시민들도 명백히는 아니더라도 이러한 기류를 어느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대다수가-어쩌면 전부-살아남지 못할 걸 알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살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한다면 인류가 아니다.

  그 때문에 의장은 시민들 앞에 서서 용기를 북돋고 희망을 주기 위해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장의 의지가 시민을 감동시켜서였는지 어느새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인류에게 경의를!"을 따라 외치고 있었다. 의장은 절정에 달한 황혼 빛이 내리쬐는 '재생'에 넘쳐흐르는 구호의 메아리를 들으며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 속으로 읊조렸다.
 
  '살수 없음을 알고서도, 아니 알기에 살고자 하는, 그럴 수 밖에 없는 바보들, 인류에게 경의를.'

  군중은 아직도 환호하고 있었다.

by 커맨더 | 2009/09/22 14:41 | 자작소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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